정체화 보류 일기

 그냥...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.

 난 여자가 맞나?

 어... 글쎄?

 난 여자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?

 그러게...


 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아예 제로는 아닌 것 같은데, 그렇다고 백도 아니야.
 그렇지만 난 지금까지 디스포리아랄 것도 느껴본 적이 없는데...

 이게 내가 시스라는 증거가 아닐까?

 내 고민이 시스의 맘 편한 기만일까 봐, 한동안은 그냥 속으로만 생각했다.


 내가 여자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.

 난 ‘여자’, ‘여성’으로 표현될 수 있는 사람인가?

 다른 시스들도 이렇게 자기 성별에 확신이 없고 그런가?

 나도 날 정말 모르겠다.


 정체화 대법관이 날 낱낱이 분석해서
 ‘당신은 어쩌구입니다. 땅땅땅.’하고
 정체화 땅땅 해 줬으면 좋겠다!


 그러다 그냥,

 에이, 내가 시스면 이런 고민이나 하겠나.
 이런 고민을 하는 거부터가 일단 시스는 아니라는 증거겠지...

 싶어서, 그냥...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.


 그래, 일단 논바젠퀴인 것 같긴 한데, 그래서... 뭐지?

 데미걸...? 글쎄, 이것도 나한테 딱 맞는 건 아닌 것 같아...


 정체화가 너무 어렵고, 진짜 잘 모르겠어서...
 난 그냥 정체화를 보류하기로 했다.

 ‘정체화 거부’랑은 다르다.
 난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일단 보류하는 거다...
 나중 가서 정체화 거부를 할 수도 있겠지만...

 퀘스쳐너리라고 하면 퀘스쳐너리일 수도 있겠는데,
 딱히 지금은 퀘스쳐닝을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.

 그냥 ‘보류’가 더 어울리는 것 같아...


 사실 나는 지향성(로맨틱, 섹슈얼)도 일단 보류 상태다.

 이전에 엄청 길게 내 정체성에 이름을 붙였던 때가 있었는데...
 나중 가니 다 헷갈리고, 이게 날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냥 다 버렸다.
 
 뭐 이것 저것 복잡하긴 한데,
 일단 바이 엄브렐라에 있는 건 확실하니까.

 그래서 지금은 그냥 바이 엄브렐라 어딘가에 있다고만 하고 있다.


 그래서 결론은... 음. 특별히 없는데.
 그냥... 일단은 퀴어고 정체화는 일단 보류했습니다.

이어지는 내용

나는 어쩌다 이러고 살게 됐을까? - 비건 지향인이 된 이야기 (1) 일기

 정말 오랜만에 블로그를 써 본다...
 십 년 전 쯤에 이것 저것 쓰는 잡다한 네이버 블로그를 했었는데.
 나중에 다시 보니... 너무 끔찍해서(?) 모조리 비공개로 돌렸다.
 네이버 블로그를 쓰려니 왠지 예전의 부끄러운 기억이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아서 이글루스에다 쓴다.

 일단 나는 동물권자고, 비건 지향인이다. (음... 써 놓고 보니 이 말이 왠지 무겁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별로다.)
 이 글을 읽을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것 같지만... 머 글타.
 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어서 이렇게 살고 있다.
 내 삶 속의 거의 모든 의사결정에 있어서 비거니즘은 정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고.
 ‘비건’이라는 게 내 중요한 정체성 중 한 가지가 됐다.

 맞다, 내가 이 글을 쓰는 건 남들에게 읽히기 위해서라기 보단 그냥 기록용이다.
 자꾸만 뭔갈 잊어버리는 게 너무 속상해서...
 암튼 그러니까 뭐 가독성이 떨어지고 백해무익한 글이라도 양해 부탁.

 나도 5~6년 전쯤엔 ‘남들처럼 평범하게’ 살았다.
 귀여운 강아지도 좋고 맛있는 치킨도 좋아.
 나는 대상화된 모습의 동물들을 정말 좋아했다.
 그래서 장래희망은 동물 관련 직종을 꿈꿨다.
 나는 책 읽는 것도 좋아해서 학교 도서관에 자주 갔다.
 자연과학 도서 쪽에서 동물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었다.

 중학교 2학년 때, 그냥 평소처럼 책을 고르다가...
 《동물권, 인간의 이기심은 어디까지인가?》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.
 결론(?)부터 말하면 이 책이 내 삶을 뜯어고쳐놨다.
 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내가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진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.
 근데 뭐... 충격 받았겠지.
 내가 먹어온 ‘고기’가 이렇게 만들어지는 거라고? 이런 줄은 몰랐어. 이제 먹으면 안 될 것 같다.
 뭐 대충 이렇게 생각했겠지. 그러니까 동물을 안 먹겠다고 다짐했겠지?

 그 책을 읽고 바로 비건이 되진 않았다.
 그 책을 읽고 비건이 되기까지 한 3~4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.
 꽤나 오래 걸렸다... 생각해보면 나도 꽤나 보수적이고 변화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다.

 일단 채식을 해야 할 것 같은데, 뭐 어떻게 해야하지.
 그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채식주의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.
 실제로든, 뭐 TV나 인터넷에서든...
 그래서 네이버에 채식에 대해 검색해봤다.
 ‘채식 단계표’가 나왔다.
 음... 페스코? 이거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...

 그렇게 나는 ‘채식 단계표’에 얽매인 삶을 시작했다.


 ~다음에 계속~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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